가톨릭 사회운동 -社會運動

[라] motus socialis Catholicus [영] Catholic social movement

 

3-1.   가톨릭 노동 운동

   한국 가톨릭 교회의 노동 운동은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결성과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 가톨릭 교회가 노동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1958년 시작으로 1960년대에 수언교구 선면공업주식회사 노조 결성, 서울대교구 드레스 미싱 노조 결성, 전주교구 제지 공업 임금 인상 사건등에 관하였다.   교회 전체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이 주도적으로 노조를 결성하여 탄압을 받게 되면서 구체적인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교회뿐 아니라 전사회에 노동 문제가 본격적인 관심사가 된 것은 1970년에 전태일 분신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12~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작업 환경에 시달리며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던 노동자들의 삶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10여 년의 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직장에 봉사하는 수준이었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문제는 도외시하는 단계였다.   그렇지만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당시의 상황에서 노동의 가치를 올바르게 깨우치고 노동자의 인간 된 보람을 위해 노동 사회의 혁신을 부르짖으면서 단결의 터전을 만들어 나가는 등 그때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역활을 하였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노동자 안에서,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를 위해' 노동자 운동의 계기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 이후 생산직 노동자들이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구성원의 다수를 이루게 되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활동은 점차 임금, 근로 조건, 인격적인 대우 등의 노동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또한 연대 활동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도시 산업 선교회와 함께 활발한 현장 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 성과는 동일 방직, 콘트롤데이타, 서울통상, YH등의 노동 현장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이 민주 노조 운동에 촉매 역활을 한 데서 드러난다.   그 결과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와 도시 산업 선교회는 유신 정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유신 정권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노동 운동은 교회와 큰 마찰이 없이 노동 운동의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과 1970년대 노조 운동은 경제 투쟁 (생존권 투쟁) 중심이었고, 인권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정치 변화를 잘 파악하지 못해 12.12 군사 구데타로 1970년대 민주 노조의 해산과 함께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사회 환경에서 노동 문제는 사회주의 운동과 동일시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노조 운동을 위축 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80년 5월 광주 항쟁을 계기로 외세 -군부- 매판 자본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사회 현실을 조명하게 되었고 노동 운동에 있어서도 정치 지향적인 운동이 확산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1970년대의 민주 노조 운동이 갖고 있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다.   또한 맑스. 레닌주의 (Marx-Lenisim)가 일반 노조 운동의 변혁적, 사상적 이론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극심한 이론 투쟁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역대 교황들의 사회 회칙과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활동은 침체 되었다.   그것은 공안 기관의 탄압과 일반 노동 운동의 성장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ㅜ가톨릭노동 청년회 운동에서 한계를 느낀 (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린즈 회의의 결과를 보고 1세계와 3세계권이 분화 되었다) 노조 운동과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 출신의 노동자들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등과 함께 공단 지역으로 이전하여 나름대로 노동자들에게 초보적인 권리 의식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잡단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현실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천주교 정의 평화 위원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고, 권리 신장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 서명 운동'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벌이게 되었다.   또 하나 특이할 사건으로는 부평. 이리. 성남등의 노동 사목이 주축이 되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서 보다 의식적이고 진취적인 회원등이 지원하여 '가톨릭 노동 사목 연구소'를 창랍힌 것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노동 현실에 대한 실태 조사, 노동    법 개정 연구, 노동 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권리를 자각시키는 활동을 전개 하면서 노동 사목간의 연대의 기틀을 다졌다.

   1986년과 1987년에는 지역 노동 사목이 부천, 주안, 대구, 마산, 부산, 반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그 결과 '가톨릭 노동 사목 전국협의회'가 결성되었다(당시 16개지역).   1987년의 노동자 투쟁은 1960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노동 대중들의 불만과 지향이 집약, 집중되어 나타난 노동자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위한 대투쟁이었다.  

   노동 현장 곳곳에서 터져나온 투쟁의 열기는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등의 요구로 나타났고 이는 한국 노조 운동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1987년의 6월 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 여소 야대의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소위 공안 정국이 조성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노동 운동과 기충 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조직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3년여에 걸쳐 민주 노조 운동이 발전하였고, 전반적인 노동 대중의 의식적.조직적인 발전을 가져온 후였기에 그렇게 심각한 타격은 입자 않았다.    가톨릭 노동 운동은 전체 민족 민주 운동과 함께 계층, 지역을 극복하고 연합적인 단결체를 지향하면서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의 발전에까지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