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회복지 - 福祉事業

[] Catholic welfare work ( Catholic welfare   service)

 

3.   아동 복지 사업

    개인적이고 비조직적인 자선은 몸범적인 초기 신자들 사이에 열심히 행해졌으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 사업으로는 1854 매스트르 (Maistre) 신부에 의해 설립된 영해회 사업이 효시였다.

   베르뇌 (Berneux) 주교는 1857년 8월 2일자로 반포한 <장주교윤시제우서>에 <영해회 규칙>을 실어 각처 공소의 회장집에 비치하여 누구든지 볼 수 있게 했다.    이에 다르면 영해회의 목적은 죽을 위험이 있는 외교인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신자 가정에 분산 양육하는 위탁 보호였다.   이것은 당시 종교 박해 때문에 아이들을 함께 모아 보호한ㄴ 수용 보호가 불가능하였기때문이다.    보호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는 것이었으나 때로는 고아가 아니더라도 부양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 위탁받은 아이들도 보호하였다.  

   영해외 사업은 비록 박해로 인해 신자들 가정에 위탁 양육을 했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사회 복지 내지는 아동복지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선구적인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해회는 아이들에게 소위 시설병 (Hospitalism)에 대한 나쁜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고 철들 때까지 양육하고 그 후부터 생업을 위한 기술 교육을 실시 했고 마침내 나이가 차면 적당한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으니, 이는 훌룡한 현대적인 복지 사업이었다.

   피비린내 나던 박해가 어느정도 가시고 우리 정부가 서방 여러 나라와 수교 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부분적인 허용이 있게 되었고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종교 자유가 명문화 되었다.   이 때 조선교구장 블랑(J.Blanc) 주교는 정부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노인과 병자, 고아들을 구헤하고자 양로원과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1880년부터 이미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구제하여 여교우나 자식이 없는 교우를 몰색하여 기르게하고 보육료를 지급하였다.   이것은 이미 20여 년 전 영해회가 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고아들을 돌본 것 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곤당골 (미동, 현 을지로 1가 미대사관 서측)에 기와집 한채를 사서 영해원을 설립하여 무의 무탁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열심한 교우 몇명에게 이들을 보육하게 하였다.   1885년 3월 15일에는 곤당골에 '천주교 고아원'을 설립, 제1대 원장에 블랑 주교가 취임하였다.    블랑 주교는 1888년 9월 8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천주교 고아원'의 운영을 맡겼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 복지 시설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실정은 가난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기아. 고아가 많이 발생했고, 정부나 사회에서 이들을 위한 시설 보호를 행하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자연히 '천주교 고아원'에 몰리는 숫자가 많았다.   수녀들은 일정한 수입원이 없이 이런 사업을 계속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천주교 고아원 제3대 원장 가밀 수녀는 1915년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바자(bazzar)를 열었다.    이것이 또한 한국 최초의 바자를 기록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5년 간, 그리고 전쟁 후에도 수녀원과 고아원의 궁핍은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성영회 본부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주던 돈이 즐어들거나 대로는 정기적으로 송금이 되지 않아 큰 수입원이 없는 수녀원에서는 150명이 넘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국내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의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천주교 고아원은 계속 경영난을 겪어 오다 1943년 1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더욱 운영난이 심해져 만 13세의 아동에 대해 정부 구호령에 의한 구회비를 지급받기 시작했다.

   수녀들이 한국에 진출한 후 수녀회가 뻗어나가는데는 고아원도 함께 생겼으니 1894년 8월18일에는 인천에 수녀회 분원을 설립하면서 고아원과 시약소를 함께 시작하였다.   마침 초대 원장 클레망 (Cle'mence) 수녀는 통킹의 서양 군대 병원에서 여러 해 근무 했던 경험이 있어 병자 간호를 잘해 환자들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천에 시약소가 설치 되었고 동년 가을 부터는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하여 고아원도 시작되었다.

   1915년 10월 15일에는 대구 바오로 수녀원에 고아원을 부설하였는데 지금의 백백합보육원이 그것이다.   1932년 10월 5일에는 전주 수녀원에 부설 영해원을 설립하였고 1946년 2월에는 부산 범일동 성당에서 본당 주임 정재석 (요셉) 신부가 해방과 함께 귀환한 동포들로 주거와 양식의 극심한 곤란 속에서 고아들이 거리에 범람함을 보고 이를 구케코자 20여명의 고아들로 소화보육원을 발족했다.

   이와 같이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온 즉시 처음 착수한 사회 사업이 고아원과 양로원 사업이었고 이 또한 한국 최초의 현대적 사업으로 선구적 역활을 해왔다.   다만, 초기의 신자 가정에 맡겨 기르던 결연 사업이 1880년대에도 있었으나 고아원 시설이 생기고투터 더 발전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통해 걸식아와 전쟁 고아가 양산되던 시기에 교회는 시설 수용 아동 복지 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그러나 이시기의 아동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 아동 복지 대상 아동의 양상은 전쟁 고아에서 미혼모와 결손 가정으로부터 버려진 고아로 바뀌었다.    이러한 아동 복지 대상자의 변화에 대처하는 국가 정책은 인구 억제 정책과 맞물려 피임과 인공 유산을 장려하는 가족 계획 사업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태어 났으나 버려진 아동들에 대해서는 해외 입양을 장려했다.   여기서 '고아 수출 국가'라는 악명과 함께 온 세계로부터 비난을 듣게 되었다.

   아동 복지에 있어서 시설 수용 보호는 최종적인 방법이라야 하며 입양이나 위탁 보호가 더욱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이 학문적으로는 이때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내 입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해외 입양을 무조건 금한다는 것도 적절한 대응책은 아니었다.   이에 한국 가톨릭 교회는 1989년 서울 세계 성체 대회를 계기로 '한마음 한몸 운동' (The one heart-one body movement)을 통해 국내 입양 및 결연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주요 사업 내용은 입양, 사랑의 부모 (일시 위락), 결연 사업, 생명 수호 운동 등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의 변화와 교회이 분위기에 다라 1980년대에 와서 종전의 아동 복지 시설들은 상당수 아동 및 가정 문제 상담소, 미혼모 시설, 모자 보호 시설등으로 사업 내용을 바꾸는 추세를 보였다.   미혼모와 결손 가정의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 입양 또는 위탁 보호를 알선 하였다.   저소득 주민 밀집 지역에서는 공부방, 유아원, 탁아소 시설등의 시설 사업을 통해 가정을 돕는 방향으로 아동 복지 사업의 방향을 바꾸어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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